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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과학과 인문주의
슈뢰딩거는 물리학을 포함해 그 어떤 학문을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 삶 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그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 면서 그러한 학문의 전형을 찾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학문 세계를 새 로운 시각으로 더듬어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양자역학이 인간 의 정신세계 안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나름의 직관을 통해 모색해 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학자라면 누구나 추구해보아야 할 일이지만 오늘 그런 학자들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 닌 양자역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슈뢰딩거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 다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며 그렇기에 더욱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리 게 된다. 현대의 진정한 학문 정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 나 한 번씩 이 책에 눈길을 돌려야 할 이유이다.
책소개
슈뢰딩거의 전설적인 시리즈 강연들 중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강연의 전문을 완역한 책이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는 이뤄진 후 각각 1954년과 195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에디토리얼에서 펴내는 한국어판은 1996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블랙홀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의 서문을 붙여 합본으로 출간한 판본을 번역했다.
양자역학의 초석을 놓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 철학, 역사를 아우르는 명강연의 한국어 초역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이하 『강의』)는 슈뢰딩거의 전설적인 시리즈 강연들 중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강연의 전문을 완역한 책이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는 이뤄진 후 각각 1954년과 195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에디토리얼에서 펴내는 한국어판은 1996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블랙홀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의 서문을 붙여 합본으로 출간한 판본을 번역했다.
명강연자가 남긴 과학 고전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시대를 열어젖힌 이론물리학자다. 1926년 ‘슈뢰딩거 방정식’을 포함한 논문을 비롯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파동역학을 정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1933)을 받았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대중 과학서로 널리 읽힌 그의 책은 양자역학이나 일반 물리학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과학 고전으로 사랑받은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가 대표적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근원을 궁구하는 물리학자의 태도도 엿볼 수 있지만 아무튼 그 책은 생명과 유전 현상을 다루며,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을 “비주기적 결정”(aperiodic crystal)으로 상정하고 그 구조를 물리학적으로 추론하면서 생명 현상의 특성과 유전물질에 관해 독특한 설명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후, 이 책의 내용 중 명백한 오류들이 지적되었지만 강연과 출판이 그 전에 이뤄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활자화되어 호평을 얻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슈뢰딩거 책들은 강연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
『강의』에 수록된 두 편의 강연 중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하 「철학자들」)은 1948년5월24, 26, 28, 31일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진행된 네 차례의 대중 강연이 토대가 되었으며, 책으로 출간된 해는 1954년이다. 「과학과 인문주의」는1950년2월 더블린고등연구원에서 4회에 걸쳐 진행된 시리즈 강연 ‘인문주의의 구성 요소로서의 과학’의 출판본이다.
슈뢰딩거는 「철학자들」에서 과학적 세계관의 근본적인 특성을 도출하고자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과 과학이라는 사고체계의 특수성과 연관된 몇몇 학파의 학설을 조사한다. 과학(물리학)에서 그러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기초과학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이 고대의 철학과 과학에 닿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당시에 유럽 학술계에 형성된 이러한 회고적 연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물리학자의 시각에서 포착해낸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과학과 인문주의」도 「철학자들」의 기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런 바탕에서 고대의 자연철학 이래 수천 년간 물리학이 다뤄 온 ‘물질’이란 개념의 기본 특성을 설명하고, 그 개념에 내포된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논제들의 난점과 모순 등을 자세히 다룬다.
과학은 그리스인의 발명품이다
슈뢰딩거가 여러 고전학자의 주장과 다양한 문헌을 검토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을 가져와보자.
근대과학을 주조한 사상가들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음을 […] 고대 과학과 철학을 진심으로 되살리고 계승했습니다. _37쪽
다음 구절은 존 버넷(John Burnet)의 『고대 그리스 철학(Early Greek Philosophy)』의 서문에서 가져왔습니다. “… 과학은 ‘그리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_40쪽
원자론을 근대과학에 도입한 가상디와 데카르트의 삶과 글을 보면, 우리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습 니다. 그들은 원자론을 도입하면서, 자신들이 열심히 공부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이론을 (스스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고대 이론의 모든 기본 특성들이 대단히 강화되고 폭넓게 정교해져서, 그러나 변하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 이론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_118쪽
“과학은 그리스인들의 발명품이다.” 과학은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벗어나서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 곰페르츠(나는 그를 아주 많이 인용했습니다)는 우리의 현대적인 사고방식 전체가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기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의 사고는 특별하고, 수세기에 걸쳐 역사적으로 자라왔으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마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특수성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_128쪽
슈뢰딩거는 근대과학, 특히 물리학은 고대 과학과 철학의 직계 후손이란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논점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신중하게 선택한 고전학자들의 견해에 드러나 있듯 “그리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사고하는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에 동의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물리학 이론 안에 어떤 방식으로 흔적과 영향을 남겼는지를 밝히는 데로 향한다.
원자 혹은 입자 그리고 연속체라는 문제
슈뢰딩거가 말하는 기초과학의 위기는 물리학의 위기와 동의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양자역학도 완벽하지 않았으며 그 상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슈뢰딩거는 1961년 타계하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여러 이론적 시도를 보지 못했다. 가령 로저 펜로즈가 서문에서 언급하는 끈이론이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통일장이론, 대통일장이론, 만물이론, 최종이론 등 입자와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적 시도들이 진전을 보았지만, 어느 것도 실험적으로 완벽히 입증되지 않고 있다.) 슈뢰딩거는 파동방정식을 고안하여 양자역학의 이론적 기틀을 놓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바로 그 1920년대는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로 방출된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나타난다는 광양자 가설을 주창하며 시작된 양자역학의 중심 이론이 결정되려던 시기였다. 경합을 벌이던 양 진영의 한편에는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1927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의 승자는 닐스 보어였다. 보어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에 끝까지 반대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불확정성 원리의 확률론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연속체와 결정론을 고수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오랜 기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슈뢰딩거는1부 1장에서(34쪽부터)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 일으킨 사유의 혁명보다 자신이 더 주목하는 바를 밝힌다. 양자물리학도 실은 근대과학이 계승한 고대 과학과 철학의 기본 개념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미처 발견되지 못한 “선입견이 포함된 관념들과 부적절한 가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요소들을 분명히 인식한 슈뢰딩거는 이론학자로서 어떤 한계에 봉착했음을 자각했으며 물리학의 위기는 정교한 이론 속에 고착되어버린 고대의 유산을 파악하고 고치는 작업을 통해 출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자론의 대두 이후 발견된 ‘기본 입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긴 해도 고대 원자론이 상정한 ‘원자’의 개념이 수정을 거치며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대 원자론을 완성한 데모크리토스가 설명하는 원자의 주요 특징은 109~112쪽에 걸쳐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으며, 여기서는 몇 가지만 간추려보겠다. 세계는 빈 공간(허공)과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는 모두 동일한 물질이거나 동일한 성질을 띠며, 엄청나게 많고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원자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서로 뭉치고 밀어내며 우리 눈에 보이는 다양한 물체와 현상을 만든다. 실재와 맞지 않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체로 보아 고대 원자론은 굉장히 평범해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무리가 없고 당연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설명을 들어보면 고대 그리스인에게 ‘빈 공간’이라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관념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있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에 비어 있는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우키포스-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로 이어지는 고대 원자론의 계보에서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원자’와 ‘빈 공간’이란 개념은 어떻게 해서 도입되었을까?
‘연속체’(continuum)라는 수학 개념이 있다. 수학이 아니어도 일상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예컨대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연속성을 갖는다. 간단한 예시로 정수0과1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소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수학 시간에 연속체라는 개념을 들어보지 못했어도 그 개념을 다루는 방법을 익혔던 것이다. 이처럼 너무도 자명한 연속체 개념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심각한 난제였다.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에 대응하는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우리는 이것을 √2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아킬레스와 거북의 달리기, 날아가는 화살에 대한 제논(엘레아학파)의 잘 알려진 역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래에 대한 다른 역설도 있고, 점들로 이루어진 선에 대해 계속 제기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_91~92쪽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인들은 부피가 고무풍선처럼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과 같은 연속체의 상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물체들이 따로 떨어진 개별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방식”으로 부피를 이해해야 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매우 뛰어난 기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밑면에 평행하게 원뿔을 두 개로 잘랐을 때 위아래 단면에 생기는 두 원이 크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선으로 연결된 원뿔의 표면도 엄밀하게는 매끄럽지 않다. 데모크리토스는 극소량의 개념, 수학의 미적분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뿔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한 장본인으로 수학적인 연속성과 순수한 기하학의 엄밀성이 일치하지 않는 해법으로서 원자와 빈 공간이라는 원리를 재발견했다.
원래 원자와 빈 공간은 데모크리토스의 스승 레우키포스의 아이디어이며, 희박화와 조밀화 원리는 밀레토스학파의 아낙시메네스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아낙시메네스의 견해도 알고 있었지만 그 논리 중 맞지 않는다고 여긴 것을 수정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기본 물질을 ‘공기’로 보았고, 모든 물질은 적절한 환경에서 조밀해지거나 희박해지면서 고체, 액체, 기체로 변화한다고 보았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하나하나가 희박해지거나 조밀해졌는데도 물질 자체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변하지 않는 작은 물체(즉 원자)가 그 성질은 유지하면서 희박해지거나 조밀해지려면 작은 물체들 사이의 공간이 비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재와 이론 사이의 간극
이제 남는 문제는 수학적 사고의 구성물인 연속체(결정론과 짝을 이룬다)를 계속 껴안고 있는 이론의 실재와의 정합성이다. 이것이 진정 근원적인 모순이라서 이론의 불완전함을 지속으로 야기하는데도 우리의 뿌리 깊은 사고 습관 탓에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슈뢰딩거는 파동방정식을 만들고 양자얽힘 현상을 예측한 후로 자신의 이론에서 뚜렷한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론물리학보다는 형이상학 연구, 더 나중에는 베단타철학으로 기울어졌다. 아마도 그는 이 책의 1부와2부 초반에 피력하듯 어떤 통합적인 길을 모색했던 듯하다. 그의 생각을 더는 알지 못하지만, 그리고 그도 정답을 말해주지 못했지만, 이 책에 자신의 ‘파동역학’에 관해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겨 놓았다.
관찰 사실들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연속적인 서술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여러 사례에서 정말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완전한 서술 즉 공간과 시간에 틈이 있는 그림으로부터는 명 확하고 모호하지 않은 결론들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서술은 흐릿하고 임의적이고 불명확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_190쪽
파동역학의 이런 그림에는 틈이 전혀 없습니다. 인과관계에도 틈이 전혀 없습니다. 파동의 상은 완전한 결정론에 대한 고전적인 요구에 부합합니다. […]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관측 가능한 사실들이나 자연이 정말 어떤 모습인지 알려준다고 믿을 수 없는 그런 서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_191쪽
파동의 상에서 제거된 틈은 파동 그림과 관측 가능한 사실들 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물러나버렸습니다. 관측 가능한 사실들은 파동 그림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모호한 것이 많이 남아 있고, 앞에서 말했듯이 몇몇 낙관적인 비관론자들 혹은 비관적인 낙관론자들은 이러한 모호함이 필수적이며 피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논리적인 상황입니다. _192쪽
첫 단락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가리키는 내용이고, 둘째 단락은 자신이 고안한 파동방정식이 아이러니하게도 고전역학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고백이며, 셋째 단락은 예측력이 좋기로 이름난 파동역학이 ‘임시변통’일 뿐이라는 솔직한 현실 인식이다. 슈뢰딩거가 제기한 문제들은은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이론을 매만지고 고도의 수학을 다루는 연구자에게도, 과학을 인문주의의 필수 요소로 인식하는 독자에게도 오래도록 곱씹을 만한 생각거리다.